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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

[나의 대학원 시절] 4. 시료채취

by Prof. Sung-Deuk Choi 2023. 10. 10.

지구과학, 특히 지질학에서는 현장답사 나가는 것을 필드 나간다고 했습니다. 요즘도 이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지금 필드 나간다고 하면 야외 골프장에 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더 많을 듯 합니다. 포항이나 광양 등에서 대기시료 채취를 하는 중에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한 95학번 친구들이 가끔 전화할 때가 있었는데, "샘플링 나왔다"라고 하면  "필드 나갔냐?"라고 묻곤 했습니다. 

 

박사 초년차까지는 주로 소각장 굴뚝 시료채취를 다녔고, 그 이후에는 수동대기채취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 제 연구실에서 소각장 굴뚝 시료채취 경험이 있는 졸업생과 재학생은 전혀 없습니다. 예전보다 시료채취 장비가 많이 좋아져서 꿀뚝 시료채취가 편해졌지만, 요즘 학생들에게는 냄새와 소음이 심하고 위험한 곳에서 시료채취를 해야 하는 연구를 시킬 수는 없습니다. 굴뚝에 TMS가 설치되고 IT 기술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굴뚝에서 배출되는 극미량 오염물질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직접 올라가야 합니다.

(좌) 1999년 모 소각장에서 다이옥신 시료채취 중 (우) 2001년 모 업체 굴뚝 아래에서 저 높은 곳을 올라가야 하나? 라며 당황하던 장면

 

이 글을 올리고 며칠 후에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 내용을 추가합니다. 
1999년 경남 소재 소각장에 가서 다이옥신 시료채취를 하고 있는데 업체 직원분이 어디서 왔냐고 해서 포항공대에서 왔고 학생이라고 했더니 "낮에는 이렇게 일하러 다니고 야간에 대학 다니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 네~라고 했습니다.  

 

석사과정 중에는 "내가 공부하려고 대학원에 갔는데 허구헌날 굴뚝에 올라가네" 라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전국의 대기환경 전공 교수 중에서 이렇게 많은 공장과 굴뚝에 가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라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다양한 신규 유해오염물질이 굴뚝을 통해서 얼마나 배출되는지에 관한 연구논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실태 조사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가 거의 없고 이런 연구에 대한 R&D 지원도 거의 없습니다. 

 

일반 환경대기채취는 굴뚝 시료채취보다 훨씬 쉽지만 공장 내부에서는 이렇게 시료채취를 할 때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마스크도 제대로 안 쓰고 그냥 들어가서 숨을 참으며 시료채취를 했습니다. 

2005년 모 업체에 방문해서 핸디펌프와 테들라백으로 시료채취 중 (악취/VOCs 채취)

 

고용량대기채취기는 미량오염물질을 채취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항상 전기가 필요하고 소음이 있어서 학교 옥상이나 관공서 옥상 등 소음 민원이 없는 곳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주택가 옥상에서 시료채취를 하다보면 민원이 들어와서 시료채취를 중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연구 중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박사과정 중에 여수광양 지역 시골 초등학교에 협조 공문 보내고 시료채취를 했는데, 시끄럽다며 소리 치던 교장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HiVol 시료채취는 대학 옥상에서 하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합니다.  

2005년 포항공대 옥상 HiVol 채취기(중금속, 다이옥신, PAHs 채취)

 

반면, 수동대기채취의 장점은 그냥 아무 곳에서 매달면 된다는 것입니다. 안전한 장소를 섭외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시료채취 지점으로 선정하면 그 후에 반복해서 채취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치입니다.

2006년 포항시 관공서에 설치한 PUF-PAS (PAHs와 POPs 채취)

 

도로변에 눈이 오면 며칠 후에는 눈이 아주 지저분합니다. 자동차 매연과 먼지가 침적되기 때문입니다. 눈이 녹으면 유해물질이 토양이나 하천으로 이동합니다. 이런 오염을 비점오염이라고 합니다. 이런 연구를 해보려고 2005년에 눈 시료도 채취했는데 캐나다로 포닥을 나가면서 관련 연구를 못했고, 귀국 후에 시료도 없어졌습니다. 울산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고 오더라도 금방 녹아서 눈 관련 연구는 아예 생각도 못합니다. 그래서 눈 연구는 못 하고, 도로변 먼지 연구와 하천 비점오염 연구를 했습니다. 

2005년 채취한 도로변 눈 시료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위과정 중에 당장 할 수 없어도 계속 관심을 갖게 되면 언젠가 비슷한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산불시료도 종종 채취했습니다. 산불이 난 곳에 방문해서 시간별로 나무 껍질, 재, 토양 시료를 채취하고 주로 PAHs를 분석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도교수님과 강원도 낙산사 산불 장소에서 시료채취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에 3년 다녀오니 역시나 이 시료가 포항공대 실험실에 없었습니다. 후배들이 연구실 청소를 하면서 과거 시료를 모두 버렸습니다. 

2005년 강원도 낙산사 산불 시료(토양, 재, 소나무 껍질) 채취

UNIST 부임 후, 울주군에서도 산불이 나서 산불 연구를 했고 아래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산불시료 채취 경험을 바탕으로 10년 후에 좋은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연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하는 일로 논문을 못 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언젠가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환경모니터링 분야에서 가장 기본은 시료채취입니다. 현장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나중에 측정자료만 해석하거나 모델 연구를 할 때 도움이 됩니다. 

현장 경험 없이 컴퓨터로만 환경을 연구하면 거의 상상만으로 보고서나 논문을 쓰는 엉터리 연구자가 됩니다. 어떻게 시료를 채취하고,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미량 분석을 하고, 자료를 처리하고 통계와 모델로 결과를 해석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료만 받아서 논문 쓰고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빅데이터와 AI가 유행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는 모니터링 기초 위에 모델링과 자료처리 기술을 갖추는 것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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