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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

[나의 대학원 시절] 1. 포항공대 대학원에 입학한 이유

by Prof. Sung-Deuk Choi 2023. 9. 22.

저는 서울대를 4년 만에 졸업하고(군대는 박사과정 중 병역특례), 바로 포항공대 대학원 환경공학부에 석사로 진학했습니다. 이후 포항에서 석사 2년, 박사 4년, 포닥 1년, 총 7년 동안 살았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겠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학부생들이 포항공대 대학원에 많이 진학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 결정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본가가 서울에서 가까운 춘천인데 왜 머나먼 (당시에는 대구-포항 고속도로도 없을 때였습니다) 포항으로 갔을까? 가끔 생각하면 연구차원에서는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이 들다가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도 합니다.

 

1994학년도 입시부터 수능이 생겼고(이전에는 학력고사), 저는 1995년 입시를 치렀습니다. 수능뿐만 아니라 본고사(논술, 국어, 영어, 수학, 과학 2과목 선택)를 봐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보통 원서를 세 번 낼 수 있었는데 춘천에 있는 한림대 의대, 서울대, 포항공대에 지원했습니다. 춘천고 상위권 학생들은 이렇게 세 곳에 원서를 냈습니다. 제 기억으로 카이스트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카이스트 인지도가 낮았습니다. 

 

지금이야 의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하겠지만, 옛날에는 의대에 붙어도 서울대 자연대나 공대에 진학하던 시절이었고, 수능 전국 수석은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기전자공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저도 아무 고민 없이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서는 1994년부터 일부 학과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부분 학부제가 실시되었고, 1996년에는 아예 자연대 단일학부로 통합하여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의 1990년대 변천사입니다. 현재는 지구환경과학부로 선발하고 세부 전공 선택 없이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 지질, 해양, 대기 전공으로 나뉩니다. 천문학과는 물리학과와 통합하여 물리천문학부로 소속입니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홈페이지 발췌

 

저는 1995년에 서울대에 입학해서 자연대의 급격한 변화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다양하게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제 성적표에 기재된 수강 과목만 보면 어떤 전공을 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전공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교수님들도 학생 진로상담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다른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저는 공강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종종 과학동아, 뉴턴, Nature, Science를 봤습니다. 1997년부터 환경호르몬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고, 소각장 다이옥신 문제가 발생하면서 환경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는데, 이런 잡지를 통해 관련 기사를 많이 접했습니다. 특히, 1998년 과학동아에 환경공학 전공이 소개되었고, 대표 사례로 포항공대 환경공학부가 소개되었고, 포항공대 진학을 결심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8년 과학동아 8월호

포항공대 대학원 진학만 고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스트 건설 및 환경공학과와 포항공대 환경공학부에 이메일을 보내서 대학원 진학에 관심이 있으므로 학과 홍보자료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두 학교로부터 소포를 받았습니다. 학과 소개 브로셔와 수강편람 등이었습니다. 두 학교 모두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 전액 지원을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스트 건설 및 환경공학과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전형적인 토목과에 환경 일부 전공이 개설된 경우라서 진학하지 않기로 일찌감치 결정했습니다. 

 

서울대에는 환경대학원이 있어서 환경에 관심있는 학생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학과 선배들도 환경대학원에 많이 진학했었습니다. 그래서 환경대학원 사무실에 가서 대학원 관련 자료를 요청했는데, 그런 자료가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럼 환경대학원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연구실이 있고 어떤 진로가 있는지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환경계획학과 사무실에 가서 수강편람을 받으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상세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홈페이지가 제대로 없었습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은 실험보다는 이론이나 모델링 위주의 연구를 했었고, 당시에는 별도 건물도 없이 법대 건물에 들어가 있었고, 대학원생들은 갈 곳이 없어서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특차 전형에 응시했습니다. 

 

결국, 서울대 환경대학원와 포항공대 환경공학부 모두 합격했습니다. 지금은 연구실을 먼저 정하고 지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 두 곳에서는 대학입시처럼 일단 대학원에 합격한 후에 연구실을 배정 받았기 때문에 복수지원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두 곳에 합격한 후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분들과 상의를 했는데 연구여건만 고려하면 포항공대가 좋은데, 나머지(교통, 일상생활, 인맥 등) 고려하면 서울대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공대에 진학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포항공대 시설과 서울대 시설은 비교 불가였고, 대학원 입학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항공대 환경공학부는 새 건물과 최신 장비만 있었습니다. 
  • 포항공대는 등록금과 생활비 전액지원에 기숙사비 무료였습니다. 서울대에 계속 있었으면, 거의 아무 지원을 못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2000년대 초반에 교육부 BK21 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대 대학원생들도 학비 지원을 많이 받게 됩니다.
  • 대학원 입학 후 연구실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교수님 연구실에 견학하고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최종적으로 연구실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 포스코의 제철보국 이념, 포항공대 건학 배경, 소수정예 교육, 연구몰입환경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은 중상위권 이공계 대학원에서도 대학원생 학비 지원이 많고, 연구장비도 상향 평준화가 되었기 때문에 포항공대만의 장점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인서울 현상이 심화되면서 상위권 학생들이 포항공대 선호도도 낮아졌고, 포항공대 교수님들의 수도권 대학 이직도 많고,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UNIST도 마찬가지입니다. 압도적인 연구시설 투자와 젊은 교수 채용 효과가 끝날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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